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선군(일본 제국) (문단 편집) == 창설 == 조선군의 직접적인 기원이 되는 군사조직은 [[러일전쟁]] 당시인 1904년 창설된 한국 주차군이다. 이들은 [[대한제국]]에 대한 무력 압박 및 항일 [[의병]] 진압에 투입되었으며, [[대한제국 군대해산|기존 조선군의 강제 해산]]에도 동원되었다. 이후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의 식민지가 되고 조선총독부가 들어서자 조선 주차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시기까지는 조선에 주둔하는 부대가 별도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본토 주둔 사단들이 2년 로테이션으로 한반도에 파견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대대]] 또는 [[여단]] 등의 개별 부대가 증파되곤 했다. 처음에는 1개 사단이 주둔했지만 1910년 2월부터는 주둔 사단이 2개 사단으로 늘어난다. 그러던 것이 한반도의 영토화가 확고해지면서 1915년에 한반도에 상설 주둔하는 [[육군]] 2개 [[사단(군대)|사단]]이 필요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준비된 19사단([[청진시|나남]]. 현 함경북도 청진시), [[제20사단#s-2]]([[경성부]])의 2개 사단이 한반도를 군관구로 하여 정식으로 편성되면서 1918년에 조선군 사령부가 발족했다. 2개 사단 편성이 완료된 것은 1921년. 이것이 이 항목에서 설명하는 "'''조선군'''"이다. 이들은 조선을 군관구로 하고 있으면서도 병력은 대부분 일본 본토에서 차출하여 충원했다. 조선인에게는 병역 의무가 없었고, 병역 의무가 있는 조선 거주 일본인은 숫자가 적어서 2개 사단의 병력 수요를 제대로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거주 일본인 1천여 명이 용산에서 징병 검사를 받았다는 1936년의 동아일보 보도가 있다.] 조선군 사령부 본부는 지금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용산구|용산]] 일대에 위치했으며, 육군 20사단 사령부 및 예하부대, 조선 주둔 해군 사령부도 이곳에 주둔했다. 1930년대의 지도를 보면 현재의 [[용산고등학교]] 일대에 78연대/79연대/포병대 주둔지가 있었고 [[경리단길]]에는 사격장이 있었다. [[동부이촌동]]에는 기병대가, [[서빙고동|서빙고]]에는 공병대가 주둔했다. 육군 뿐 아니라 해군 역시 주둔했는데, 진남만과 영흥만에 방비대를 두었다가 1916년 4월부터 일본이 만든 해군도시이자 군항인 [[진해]]에 군항부를 두고 구축함을 배치했다. 지금 진해가 해군도시가 된 것도 이 영향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